행복교육이 되려면…“장래희망 몰라도 괜찮아”

2016.09.24 14:14 입력 2016.09.26 15:42 수정 박은하 기자

9월 22일 경기 성남시 한국잡월드 어린이체험관에서 어린이들이 패션 관련 직업 활동을 지켜보고 있다. / 박은하 기자

자동차 개발자, 과학수사대, 패션 디자이너, 기자, 사회복지사, 플라워 아티스트, 생명공학 연구자, 중장비 기사…. 무엇이든 돼 볼 수 있는 곳. 경기 성남에 있는 한국잡월드는 9월 셋째 주 내내 학생들로 북적였다. 22일 한국잡월드에서 만난 초등학교 6학년 주은서양(12·가명)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전남에 사는 은서는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한국잡월드는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국립직업체험관이다. 1000여개의 직업정보를 담은 박물관이면서 114개 직종(청소년 71개, 어린이 53개)을 체험할 수 있고, 적성검사·놀이상담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어 체험학습장 등으로 인기가 좋다. 2012년 5월 개관한 이래 해마다 80만~85만명이 다녀갈 정도다.

“원래는 방송국 체험을 하고 싶었는데,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쇼핑몰 체험을 했어요.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상품기획안을 썼는데, 컴퓨터 만지는 것이 재밌었고 MD(마케팅 디렉터)란 직업도 새로 알았어요.” 체험학습이지만 인기 직종에 대한 경쟁은 치열했다. 어린이들의 체험 시간은 직업당 15~30분으로 4시간 동안 원하는 체험은 모두 할 수 있지만, 청소년들은 60분 동안 프로그램이 진행돼 미리 직종을 선택해야 한다. 항공기 조종사·로봇공학자·과학수사요원·레스토랑 요리사가 금방 예약이 차 버리는 인기 직종으로 꼽힌다. 은서는 “재밌었다”면서도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장래희망은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장래희망이란 자기가 될 수 있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직업을 말하게 되면 창피하거든요.”

자기가 잘하는 것, 그리고 재밌어 하는 것. 은서가 생각하는 직업 선택의 기준이다. 흔히 ‘끼’라고 부르는 것이다. 은서는 노래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면 가수가 돼야 하는데, 가수는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서는 가수가 되려면 어릴 적부터 혹독한 연습생 생활을 하고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웬만큼 노래를 잘 해도 쉽게 될 수 없다는 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하고 싶은 직업을 못 찾았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데, 장래희망 직업을 못 찾았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될까.

직업 체험활동으로 맞춤형 진로설계

은서는 이번 학기 말까지 장래희망 직업과 이유를 정해서 담임교사에게 제출해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학기 말마다 본인과 부모가 생각하는 장래희망 직업과 이유를 제출해 교육정보시스템(NEIS)에 기록된다. 이 정보는 향후 진로·진학 설계에 누적·반영된다. 12살 은서의 고민이 가볍지 않은 이유다. 2015년 학교 진로교육 실태를 보면 초등학생의 91.3%가 희망진로 목표가 있다.

“꿈을 키울 수 있는 교육, 끼를 펼칠 수 있는 교육, 교육부는 교육개혁으로 행복한 교육의 실현을 이루어 갑니다”. 교육부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메인 화면에 크게 떠 있는 문구다. 여기서 교육개혁은 흔히 진로교육의 강화로 이해된다. 교육부는 2013년 3월 ‘학교교육 정상화 추진 업무보고’를 제출했다. 미래사회에 대비해 암기 위주보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강화하고, 직업 체험활동을 교육과정에서 대폭 늘려 ‘맞춤형 진로설계’와 ‘창의 인성교육’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올해 처음 실시돼 이번 학기 전 중학교의 98%가 참여하는 자유학기제 실시와 고용정책 기본법 제18조에 의한 한국잡월드 개관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맞춤형 진로설계와 직업교육은 2009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일관되게 강조돼 왔다. 입시와 진학 위주의 획일적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사교육비 등 국민적 부담과 낭비로 이어진다는 인식에서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교육정책자문을 맡았던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의 최종 마무리 단계는 각자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유능한 직업인을 양성하는 직업교육이 돼야 하는데, 한국 교육은 획일적으로 진학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진학률이 최고점을 찍은 해는 2008년으로 83.8%였다. 반면 높은 교육열이 우수한 직업인을 양산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높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2학년도 대졸 취업자 1만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27.4%는 대학 전공과 무관한 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부터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가 장학금 제도가 확대 실시되면서 높은 대학진학률 역시 도마에 올랐다. 홍 교수는 “예술·기술 등 조기에 적성과 소질을 발견하면 필요한 교육을 일찍부터 받을 수 있어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도 절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이스터고등학교 설립, 대학구조조정, 중학교 ‘진로와 직업’ 과목 개설 등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마련됐다.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진로와 직업 교육에 대한 수요가 높다. 2002년 15~19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의식 조사에서 직업에 대한 고민은 5.5%에 불과했다. 2014년(만 13세~19세)에 이 수치는 18%로 껑충 뛰었다. 학업, 이성관계, 용돈으로 고민하는 비율은 12년 동안 큰 변화가 없다는 점과 대비된다.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의 영향으로 구체적 직업에 대한 관심이 일찍 시작된 것이다. 2012년 한국청소년진흥원의 조사에서도 학생들은 ‘내가 어떤 일에 맞는지 모른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장방문 등 직업 체험활동을 구체적 진로교육의 요소로 가장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 교육정책에서는 이에 더해 수업 혁신이 강조됐다. 스마트폰·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이 이슈화되고, 서울·경기 등 진보교육감의 수업혁신에 관한 다양한 사례가 축적된 영향이다. 2013년 문용린 당시 서울시교육감이 ‘꿈과 끼를 살려주는 행복교육’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후 이러한 교육 목표는 ‘꿈과 끼’로 표현됐다.

9월 22일 한국잡월드 청소년체험관에서 학생들이 방송캐스터, 프로듀서, 엔지니어로 역할을 나눠 방송국 직업 체험활동을 벌이고 있다. / 박은하 기자

구체적 콘텐츠·아이디어 없는 진로교육

교육전문가들은 초·중등학교 단계에서는 모두에게 공통된 기초소양 교육이 중요하고, 고등학교 단계에서는 구체적인 진로 선택의 기회가 다양하게 부여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육부의 방침 역시 ‘진로탐색’의 단계인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각자의 적성을 파악하고 일과 직업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정도를 목표로 삼고 있다. 꿈과 직업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은지처럼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은 왜 생기는 것일까.

진로교육이 이뤄지는 기본적 토대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도에서 근무하는 익명을 요구한 초등교사 ㄱ씨의 말이다. “진로교육에 대한 구체적 콘텐츠나 아이디어는 없다.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학교현장에는 급작스럽게 도입됐기 때문이다. 반면 교육청은 진로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실적을 요구한다. 또한 학부모들은 암기와 시험이 아닌 새로운 교육방식에 불안을 느끼지만 지금 하는 새로운 활동이 ‘내 아이의 미래 직업’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안심하고 수용한다. 그러다 보니 분명한 활동기록이 남는 직업체험 프로그램이 각광을 받고, 초등학교 단계에서도 진로교육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가치관을 세우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체적 직업들에 대해 알아가고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찾는 활동에 치우친다.”

초등학생의 자아탐색 역시 사회적 편견과 부모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도 진로교육의 어려움으로 꼽힌다. ㄱ씨는 2009년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진로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깨달은 점은 학생들은 자신의 장래희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어야 한다는 불안감과 강박관념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사에게만 제출하는 것인데도 그래요. 부모님의 직업 인터뷰 해오기 과제를 내니까 부모 중 조금이라도 더 근사해 보이는 어느 한쪽의 직업을 골라서 선택해 와요.” 내 장래희망 직업 중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아오라는 과제를 냈을 때 5학년 여학생이 절망했다. 이 여학생은 보기 드물게 ‘환경미화원’이 장래희망이라고 답했다. 교사는 이 학생을 격려하고 싶었지만 학생은 주변에서 롤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뉴스에 환경미화원을 검색해보니 교통사고, 임금체불 등만 검색됐다. “일단 아이들은 세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 몰라요. 학교 가면 선생님 있고 병원 가면 의사 있으니까 주변의 직업부터 찾게 되죠. 더구나 초등학생은 발달 단계상 부모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구체적 직업 위주의 진로교육이 실시되니 오히려 더 일찍부터 그런 편견 안에 강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들의 꿈은 즉흥적이다. 초등학교 6학년 김서진양(12)의 꿈은 미용사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털을 손질하러 갔다가 미용사 언니가 ‘너도 잘라볼래?’라고 해서 잘라봤는데, 강아지가 울지도 않고 언니가 ‘잘한다’고 칭찬해줬어요.” 김양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는 생각에 자신감을 얻고 기뻤다. 하지만 진로를 빨리 정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고등학생 언니는 중학생 때까지 진로를 정하지 못해서 그냥 일반고로 진학했는데 힘들어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빨리 정해야 할 것 같아요.” 일반고, 자립형 사립고, 자율형 공립고, 자율형 사립고, 국제고, 마이스터고 등 복잡하게 나뉜 고교입시제도는 학생들에게 이른 선택을 강요한다. 꿈과 끼를 찾아나가는 데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해하는 초등학생들의 심리에는 사회적 제도와 배경이 짙게 반영돼 있다.

학생들의 꿈과 끼를 마음껏 응원할 수 없다는 불편함은 교사들도 느낀다. 서울에서 근무하다 육아휴직 중인 교사 박나정씨(31)의 말이다.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역할들이 돌아가고, 직업이란 그 일들을 나눠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내 적성에 맞고 재밌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사회 나쁜 직업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육아휴직을 하면서 느꼈다. 우리 사회는 현실적으로 직업의 귀천이 존재하고 진로교육은 그 바탕 위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힘겨움을 느낀다.” 경남에서 근무하는 중학교 교사 ㄴ씨는 “계층에 따라 직업탐색의 강조는 다른 효과를 보인다. 꿈이 없다고 좌절하는 학생이 나타나는 반면, ‘나는 미용사 할 것이니까 수학 안 배울래요’라고 말하는 학생도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른 직업교육의 문제는 직업교육이 발달한 독일에서도 고민거리다. 10살 무렵 직업학교(레알슐레)와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계 고등학교(김나지움) 진학이 갈리는 독일에서도 이 같은 시스템이 계층의 고착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비판이 있다. 한국의 교사들에게 더 고민되는 지점은 한국에서 직종별 임금격차가 더 심각하며, 대부분 직장에서는 노동조합 등 보호장치가 극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산업현장이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직업교육은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10대에 대한 노동착취를 강화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2014년 마이스터고 실습생들이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례가 잇따랐다. 2016년에도 충북 제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마이스터고 학생이 자살했다. 신동하 경기교육연구소 연구실장(청솔중 교사)은 “진로특강 등 직업교육은 전문직 등 남들이 알아주는 근사한 직업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실제 그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다. 실질적으로 하게 될 다양한 일들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식, 노동윤리 등이 현재의 직업교육에서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진로와 직업’ 등 직업교육에 노동 교육이 전면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잡월드에서도 근로계약서 작성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진로 체험파크 등 관련산업 성황

관심과 불안을 틈탄 여러 가지 산업들이 흥한다. 진로체험 테마파크 키자니아는 지난달 서울 잠실에 이어 부산에 2호점을 냈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입장료 및 체험비가 3만~5만원에 달하지만 서둘러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중·고교생들을 상대로 한 진로상담 컨설팅 회사도 여럿 성업 중이다. 김성천 경기도교육청 장학사는 “진로교육이 진학교육의 폐단을 따라가는 모양새를 보인다”고 말했다. 김 장학사는 진로교육을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눈에 보이는 체험활동을 강조하는 것보다 수업 자체를 내실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단계에서 말하는 직업을 위한 보편적 역량은 협동능력, 문제해결 능력, 의사소통 능력 등이다. 국어, 수학, 과학, 체육 등 각각 교과 수업을 충실히 하면 이뤄진다. 체험활동은 충실한 수업과 결합될 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내려온 예산을 다 쓰기 위해 서둘러 체험활동이 진행된다. 돈이 들어가되 보여주기식 체험활동의 비중이 높고, 진짜 역량을 키우기보다 구체적 직업의 강박에 시달리는 진로교육이 이뤄지는 이유다.”

지역 교육공동체인 의정부 ‘꿈이룸학교’ 교장인 서우철 경기도교육청 장학사는 지금 한국에서 필요한 진로교육의 형태로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고민할 여유를 주는 것’을 제시한다. “유럽에서도 구체적 직업과 연관되는 직업교육은 15세 이후 고민합니다. 자유학기제의 모델이 된 아일랜드 전환학년제도 이 나이쯤 쉬면서 마음껏 모색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학기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정착되면서 어긋나는 지점이 발생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와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것을 찾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은 반드시 직업의 동의어가 아니다. 은서에게 “꿈이 반드시 직업은 아니다”라고 말한 뒤 “꿈이 무엇이지?”라고 물어봤다. 은서는 조금 생각하더니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연이는 같은 질문에 “아직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한국잡월드 어린이체험관에서 어린이들은 장난감 포클레인을 운전하고 119 소방차에 타 볼 수 있다. 직업교육은 내가 되고 싶은 직업을 찾아나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는 점을 배우는 기회이기도 하다. 진로교육은 ‘꿈과 끼’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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