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까치밥

2002.03.18 18:11 입력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서럽게도 가난했던 옛날을 회상한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중 일부다. 이렇듯 시골출신의 기성세대라면 그 추억의 창고속에 으레 까치밥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감을 따더라도 높은 가지의 감 몇개는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이것이 까치밥이다. 춥고 긴 겨울, 눈속에서 먹이를 찾지 못할 까치 등 날짐승을 위한 것이다. 요즘은 감을 딸 일손이 없어 동네마다 감나무 전체가 까치밥이지만 감 한개도 요긴한 음식이었던 시절이다.

우리 조상은 이처럼 자연생태와 친화적이었다. 개숫물도 식혀서 버렸던 것은 벌레의 목숨을 생각했던 것이고, 들녘에서 새참을 들기 전에 ‘고수레’를 외치며 밥덩이를 뿌린 것은 개미같은 미물들에게 “너희도 먹어라”는 뜻이었다. 사람 사이의 인정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자연에서 잠시 숨쉬는 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상생의 이치였고 그만큼 마음엔 여유가 있었다. 물질이 엄청나게 풍족해진 지금은 오히려 ‘까치밥’은 사라지고 어디를 가나 싹쓸이에, 씨말리기로 살벌하기만 하다.

까치밥은 한국의 전통적 사상이 담긴 시였다. 그런가하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늦가을의 하늘과 그밑의 부드러운 산, 담장을 배경으로 빨간 홍시가 매달린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었다. 한국적 정서의 한가지 상징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생존 투쟁이 치열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현장에서 ‘까치밥’론이 나왔다. 노무현 후보가 대전 대의원들에게 “이인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고 까치밥만은 남겨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전날 ‘이인제 대세론’의 진원지이기도 한 광주에서 예상을 깨고 1위를 했던 노후보로서는 이후보의 텃밭인 대전의 대반격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개표결과 까치밥은 거의 없었다.

〈김지영 논설위원 ign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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